지식의 권유 - 김진혁
영화 '매트릭스'를 처음 보았을 떄 저는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어쩌면 영화에서 처럼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닐수도 있을것 같아'
라고 말이죠^^ 오랜만에 그와 유사한 생각을 품게 만드는 도서를 만났습니다. 바로 '지식의 권유'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EBS 다큐멘터리 <지식채널 E>의 김진혁 PD가 쓴 작품으로서 이런류의 책은 빨리 읽지 못합니다. 아마 사색하는 시간이 상당히 길어지기 떄문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이 사실은 누군가의 유도에 의한 조작된 생각이라면? 이런식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진실'을 추구하고 진짜 지식은 무엇인지?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알 껍데기'를 깨고 진정한 '앎'에 이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박제된 학문과 편협한 지식, 그리고 주입식 교육의 폐혜를 온몸으로 체화하면 자라온 터라 그것들의 결과물인 제 자신을 깨부수고 다시 새로운 생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숙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사고 방식과 실천을 통해 '진짜지식'을 갈망하는 제 자신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사유'하는 시간을 제공 해준 '지식의 권유'는 이런면에서 매우 새로운 책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독한 '지식의 편식'에 시달려 왔습니다. 워낙 세상이 빠르게 변화 하는 탓에 실용적 지식만 추구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사고의 폭은 좁아지고 관점은 편협해져 생각은 균형을 잃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상식과 이상, 규범 등 다수의 생각이 모두 진실은 아님에도 '옮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고 보이는게,들리는게,전부라고 믿는 고집스러울 만큼 확고한 '생각의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참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이 누군가에 의해 통제받게 되고 이것은 로봇이나 노예와 같은 맥락이 아닐지 두렵기 까지 합니다.
상식에 대한 의문, 질문에 대한 질문
- 현재 우리 사회는 남다르고 다양한 사고방식보다는 '틀'에 박힌 '공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으로 뒤덮인 세상에 제대로 된 딴지를 걸고자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이자 축복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청춘들에게 필요한것은 '식스팩' 이 아닌 '생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지식의 식단' 이라는 것입니다.
주입식으로 강요된 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움직이는 지식,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를 알려주는 지식,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외면하고 말았던 지식, 청춘의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살아 있는 지식, 그래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먹먹해지는 지식 말입니다.
<당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떄 여러분은 어떤쪽이신가요? 사실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든 보수로 규정하든 그건 여러분의 자유 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한 이런 질문은 단 두 개의 예시 중 하나 고르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단순 명료한 질문조차도 우리가 모르는 큰 함정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일단 자신이 진보와 보수 중 어느 한쪽에 속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둘 중 어디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해도 일단 질문을 받게 되면
'그 질문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은, 두 가지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는 '단정적인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배타적 관계라는 걸 은연중에 암시하며 질문을 듣는 이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하도록 설득하려 듭니다.
겉으로는 양자택일의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분은 사고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당연한 말이지만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에 대해 위의 질문들이 규정하거나 강제할 수 없습니다.
양자택일을 요하는 질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도 없고, 어느 하나에 속해야 할 필요도, 그러한틀로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내 맘대로 생가갛고 내 맘대로 판단하면 됩니다.
오로지 누군가 만들어준 질문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답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차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팩트와 진실은 다릅니다.
- <지식의권유 p84> 에서 나오는 '팩트와 진실은 다르다' 라는 주제는 저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습니다.
팩트(fact:사실)가 진실이 왜 다르다는 거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언론의 보도를 토대로 '팩트'만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거짓으로 판명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운전자가 횡당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치었다>
이 기사만 보면, '횡당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운전자가 치었기에, 그러니까 행인이 무단횡단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 주로 '운전자'
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집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엔 두 가지 팩트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기사 안에 담긴 내용이 팩트인 건 맞지만
'모든팩트'가 담겨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누락된 팩트 중 먼저 하나를 추가해 보겠습니다.
< 한 운전자가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치었다. >
'빨간불에' 라는 팩트가 새롭게 추가되자 진실이 다소 달라집니다. 처음엔 운전자만의 과실로 보였는데, 신호등이 빨간불일 떄 건넜다니
행인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단정 짓기엔 이릅니다. 누락된 팩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 만취 상태의 한 운전자가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치었다. >
'만취상태'라는 팩트가 추가되니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집니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넌 행인도 잘못이 있지만 만취 상태로 운전한 운전자에게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야겠지만 어쨋거나 맨 처음의 기사에서 우리가 유추해냈던 진실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세 기사 모두가 팩트만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말입니다.
이처럼 '진실'은 단순히 주어진 내용이 '모두 팩트'라고 해서 담보되지 않습니다. 어떤 팩트를 선택해서 텍스트 안에 넣느냐에 따라서 해당 사안에 대한 진실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사실들이 팩트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 혹은 존재할지도 모르는 팩트들을 함께 고려해야 그나마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연예인들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론의 보도만을 토대로 한쪽의 치우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위에서 설명했던 예시처럼, 누락된 팩트로 인해서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기 떄문에 '확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일종의 '잠정적 진실 인정' 내지는 '조건부 진실 인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도 보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언론보도를 살펴보고 의심 가는 부분에 대해선 기사내용에 없는 키워드를
동원해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기사에 빠져있는 팩트를 보완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해당 언론조차 놓친 무언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의심과 자료조사라는 노동을 반복해야 합니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수록 특히 더 의심하며, 당연한 것일수록 왜 당연한지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이처럼 내용과 관련된 부분을 전방위적으로 조사하면 누락되거나 맥락에 어긋난 것들을 찾을수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 주입식으로 강요된 죽어있는 지식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움직이는 지식,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를 알려주는 지식,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외면하고 말았던 지식,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살아있는 지식, 그래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먹먹해지는 지식 이것이 바로 '지식을 권유하는 이유' 라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박제된 학문과 편협한 지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에만 있는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열신 사고를 통해 일어나는 행동이나 실천이 뜨거운 가슴과 어우러질 떄야말로 지식은 '진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