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권의 성격 : 호족 연합정권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호족세력에 대한 관리가 중요한 요소.
경쟁자였던 견훤에 비해 왕건의 포용력이 탁월. 신라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남.
왕건의 등장부터도 호족세력의 역할 지대 - 궁예에 비하여 호족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왕건이 유리했다는 것.
이후 고려의 발전과 변화에도 지속적인 영향
정치적 변화 : 왕건 사후 혜종 대의 혼란 - 정종의 수습 - 광종의 개
혁정치 - 경종 대의 반동정치 - 성종의 정비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 - 고려시대 제도 정비에 분기점
승과제도 : 승려에게 과거시험 실시 - 왕권에 협조해 줄 사람에게 승려 자격 인정 - 불교계 장악. 난립한 불교계를 정리할 필요성. 훈요십조에도 불교계 정리의 필요성 강조. 결국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는 천태종 성립.
승관제도 : 연등회, 팔관회 등 주요 행사에 국가에서 관리 파견 - 주요 행사의 주체를 국왕으로 하여 왕의 지위 강화.
과거제 : 일종의 국가고시로 국왕의 의지를 실행에 옮길 인재 충원
귀족의 입김이 강한 정치의 후유증으로 당(唐)이 망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과거제 강화. 황제가 최종 시험을 직접 관장하며 인재 등용 - 황제의 세력 강화 - 후주(後周) 등에서 활용. 광종이 후주의 쌍기를 등용한 것도 그러한 노하우 도입 의도 - 결국 과거제 역시 왕권강화의 수단
과거제 실시의 의미 : 원칙적으로는 신분제 사회에서 관료제 사회로의 변화
골품제와 비교 : 골품제는 부모의 신분에 따라 사람의 일생이 결정. 개인의 능력은 그 다음. 이에 비해 과거제는 국가고시에만 통과하면 출세의 기회가 보장.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 그래서 과거제가 실시되었으니 고려 사회도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난 관료제 사회라는 주장도 있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려를 귀족제 사회로 생각. 그 근거는 음서제. 즉 과거가 실시되었지만, 5품 이상 고위층 자제들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있었던 셈.
여기에 귀족들에 유리한 요소 추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경제력과 정보력 확보. 과거 응시 자격, 특히 핵심인 제술과는 최소한 향리의 자손 이상으로 제한. 또 음서로 확보한 경력은 이후 출세에 결정적 이점 제공. 대를 거듭할수록 가문 좋은 문벌에 유리. 결국 고려는 특정 문벌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문벌 귀족사회로 변질.
정치, 경제, 사회구조도 이를 반영.
정치구조 : 3성(사실상 2성) 6부, 도병마사 - 겸직이 많고,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귀족들의 합의에 의존. 그만큼 호족에서 중앙귀족으로 전환된 세력 위주의 정치
경제구조 : 전시과 체제 - 국가에서 밭과 땔나무를 얻을 산을 제공하는 제도.
특정 지역에 대한 대부분의 수탈권을 인정하는 식읍, 녹읍에 비해 국가의 통제력 강화.
원칙대로라면 전시과는 당사자가 퇴직한 후 돌려주어야 함. 하지만 원칙이 그럴 뿐, 계속 세습. 호족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지역에 대한 기존의 기득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며 이런 식의 제도가 성립했다는 해석. 이 역시 귀족의 특권을 보장하는 제도였으며, 나중에 귀족들이 대농장을 소유하게 되는 원인이 됨.
사회구조 : 기본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왕을 중심으로 귀족, 향리, 평민, 천민의 구조. 기본적으로 귀족에 여러 특권 집중.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향리도 귀족으로 신분상승할 기회가 상존.
문벌귀족 사회의 문제 폭발 : 이자겸이 대표적인 예. 귀족 위주의 정치가 계속된 결과 왕의 통제력 약화. 이자겸 같이 유력한 귀족이 왕을 허수아비로 이용하는 상황 발생. 인종의 친위 쿠데타도 여러 차례 실패. 이 과정에서 왕을 호위해야 할 금군과 승려들이 왕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발생. 결국 이자겸은 측근인 척준경을 이용해서 제거 성공.
이자겸 제거 이후에도 문벌귀족들이 정국주도권 장악.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의 귀족. 이에 인종은 서경의 귀족들을 등용하여 대항세력으로 삼음. 그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묘청. 묘청은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천도운동 벌임. 사실상 천도를 통하여 기득권을 가진 개경 귀족을 견제하려는 의도.
이러한 국내정국의 알력이 외교정책에 반영. 서경파는 천도를 통하여 북방으로 영토를 넓힐 것을 주장. 따라서 칭제건원(稱帝建元)하며 고려에 압력을 넣어오는 금에 강경하게 대항할 것은 주장. 이에 비해 문벌 귀족들은 이자겸 때부터 금과 충돌을 피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정책 전개.
묘청 일파의 무리한 천도운동과 외교정책 추진. 천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대동강에 무지개 조작. 송과 금의 충돌에 거짓 정보 유포. 이러한 무리가 드러나면서 서경파가 권력투쟁에서 밀리지 평양(서경)에서 반란.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반란이라 결국 진압. 개경 중심의 문벌귀족 기득권 강화.
문벌 귀족 중심의 정국구도가 유지되자, 여기서 소외된 집단의 불만 고조. 그 중 하나가 무신. 같은 양반 귀족이면서도 문신에 비하여 열악한 대우. 사소한 시비 끝에 일어난 정변으로 무신이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며 정권 탈취.
그러나 사회 개혁을 향한 새로운 비전이 취약. 단순한 정권 탈취의 반복. 무신들 사이의 정권 탈취가 이어지며, 하층계급의 반란도 자주 일어나게 됨.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 노비였던 망이, 망소이의 난에서 나온 구호. 무신들 중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포용력을 갖춘 최충헌의 등장으로 정국 안정. 100년에 걸친 이른바 최씨
정권 성립.
최씨정권 말기에 세계적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고려에도 침략을
손길을 뻗치게 됨.
몽고의 침략 : 몽고가 대제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려 침략에서 고전했지만, 강화도로 천도해서 저항하는 동안 백성들의 희생 막심. 결국 고려도 굴복하고 왕이 몽고제국에서 파생한 원(元)의 사위가 되는 부마국으로 전락. 그 과정에서 삼별초의
저항 발생.
삼별초는 기본적으로 고려 무신 정권을 지키기 위한 집단. 그만큼 무신 정권 아래에서는 기득권층. 무신정권의 붕괴가 이들로서는 달갑지 않는 사태. 이들이 저항하자, 원에 항복했던 고려정권이 원과 함께 진압.
원의 간섭시기 고려사회에 많은 변화 발생. 기존의 문벌귀족에 새로 귀족층으로 올라선 일부 무신집단. 그리고 원의 세력에 붙은 부원세력으로 고려 기득권층이 복잡해짐. 특히 고려여자인 기황후가 등장하고 그 아들이 원의 황제가 되면서 원래 보잘 것 없던 가문 기씨의 세력 강화. 고려의 기득권층은 문벌귀족에서 좀 더 복잡해진 권문세족으로 변화. - 왕권은 더욱 약화.
공민왕의 개혁정치 : 원 세력 약화로 인한 기회.
원 세력을 축출하며 고려 내부에도 권문세족의 횡포를 견제하는 조치.
처음에는 보우, 신돈 같은 승려를 기용하여 개혁 - 불교 세력을 이용하려는 의도.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에 의지할 필요.
이때 등장한 집단이 신진사대부(사류(士類)라고 하는 경우도 있음)
원 간섭기부터 왕이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하여 과거를 통하여 기존 정계에 물들지 않은 인재 확보 노력. - 권문세족과 성격이 다른 집단 형성
초기에는 아직 힘을 쓰지 못하는 단계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고위직에 진출하는 신흥세력이 생기며 일정한 정치 세력 형성.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자 - 성리학을 과목으로 하는 시험을 통해 관직으로 진출.
결국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했지만, 이후 변화의 씨앗을 뿌려놓은 셈.
개혁 실패 이후 고려사회는 붕괴조짐.
근본적인 문제는 권문세족의 횡포 - 많은 소유로 인하여 경제력 축적.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던 평민이 상황이 악화되면 여유가 있는 권문세족에 자금 융통 - 고리로 돈놀이 - 평민 파산, 천민 전락.
전근대, 특히 고려, 조선 사회는 평민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을 지는 구조. 예를 들어 조세, 역 등이 평민에게 부담. 권문세족 같이 권력 있는 집단은 여러 이유로 조세 포탈. 역은 아예 대상에서 제외. 이러한 상황에서 평민이 줄어들게 되면 국가는 수입이 감소. 재정 고갈.
국가재정 고갈로 인하여 여러 문제 발생. 그 중의 하나가 군비.
국가가 군대를 제대로 유지, 관리하지 못하게 됨.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혼란. 외적의 침략이 잦아짐. 예를 들어 홍건적, 왜구 등.
국가가 관리하는 고려의 군대가 이들을 처리한 능력이 되지 못하자, 권세가들이 자신의 정치, 경제력을 동원하여 키운, 사실상 사병적 성격이 짙은 군대에 국방과 치안을 맡기게 됨 - 이로 인하여 이른바 ‘군벌’이 등장- 최영, 이성계, 이방실 등.
군벌들 사이에도 권력투쟁이 일어 많은 사람들이 숙청. 그러한 과정 속에 살아남은 대표적 인물이 최영과 이성계 - 이들을 중심으로 정계도 대립, 권문세족은 최영과,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정치적 입장이 비슷. 이는 외교정책에도 영향.
기득권 수호가 우선인 권문세족은 원에 가까운 성향. 이들이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 명의 불신. 명이 원의 유산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쌍성총관부 문제 부각.
원래 쌍성총관부는 오래 전에 원에 귀화해서 원나라 사람이 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책임 아래 있던 지역. 고려에서 이자춘과 짜고 점령. 그래서 고려로 흡수. 명은 이 지역을 되찾으려 함. 최영
이 이에 반발하며 요동정벌 추진.
요동정벌에 반대 입장이던 이성계를 앞장세우게 됨 - 국제관계를 이용하여 국내정계 개편 의도 의심. 이성계의 반발로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 - 정변을 일으켜 정권 장악. 일시적으로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이성계 일파에 권력 이동.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본격적인 개혁 착수 : 대표적인 것이 과전법
고려 토지 경영의 문란 - 전시과 체제에 의하여 관리들에게 지급한 수조권 악용.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수조권을 세습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나 타인의 수조지까지도 탈점, 점유, 이를 합법화하는 조치까지 취하여 한 토지에 2-4인의 수조권자가 있게 되는 현상 발생.
권문세족은 물론 왕과 왕실, 국가권력기관, 부원배까지 가세.
예를 들어 충렬왕 - 내방고(內房庫) 설치 , 환관에게 관장, 지방의 양전(良田)을 골라 백성을 모아 경작 그 수확 수취. 경제 혼란이 왕실 제정에도 심각한 영향.
농장의 폐해는 고려 후기의 집권자들도 잘 인식 - 정치도감이나 전민변정도감 설치는 그 노력을 보여주는 조치 - 하지만 이러한 기구들이 반복해서 설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의미. 실제로 이 기구를 운영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농장의 소유자, 근본적인 개혁 기대 불가.
이렇게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리대금업. 농민이 파산하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는 물론 사람 자체도 노비로 전락.
국가는 권문세족의 횡포를 막아주지 못하면서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더욱 가혹한 징세.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투탁(投託)이라 하여 자진해서 권문세족의 노비가 되어 그들의 보호라도 받겠다는 일까지 발생. 농민파산- 노비증가-국가수입 감소의 악순환 발생
위화도 회군이 기회 제공. - 창왕 즉위와 함께 선대 때 사원에 시납한 왕실 직속 토지를 회수할 것, 양계 지역의 토지 가운데 사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추쇄(推刷)
조준의 제1차 상소 : 사전의 폐단을 열거하면서 전국의 토지를 보편적인 국가수조지로 편성한다는 원칙 천명.
이와 같이 강력한 사전 개혁 요구가 제기되자 도당에서 중신 회의 개최. 그러나 참석자 53명 중 개혁 찬성자 18,9명. 나머지 반대. 그러나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의 지원을 업고 추진.
양전사업의 시행은 토지 소유권자에 대한 확인도 겸해 수행. 토지 분쟁 정리
창왕 축출 - 공양왕 옹립으로 개혁을 위한 정지작업 완료.
조준, 정도전등은 권문세가의 손아귀에 들어간 수조권을 빼앗음. 이를 위해 대규모 토지조사사업, 기존 토지문서 소각, 새로운 토지문서 작성. 불법적으로 점유되었던 토지는 원주인에게 반환,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은 양인신분 회복. 이렇게 권문세가로부터 빼앗은 수조권은 국가로 환수되고 일부는 이성계 일파에 분배.
이것이 과전법의 핵심
여기에는 기득권자인 권문세가의 돈줄을 죽이며 집권세력의 자금 확보라는 정치적 배경도. 이성계 일파는 자신들의 입지 강화와 민심 수습이라는 두 가지 과제 달성.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 과전법 - 과전법은 그동안 사사로이 받아가던 수조권을 국가로 돌려놓는 법. 권문세족의 횡포 견제. 토지조사를 통하여 불법적으로 탈취했던 토지와 노비를 원래대로 돌려놓게 됨.
이와 관련되어 나타난 것이 불교계 개혁과 이데올로기 교체
고려사회의 붕괴에는 부패한 불교계도 한몫
농민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짓은 불교사원도 마찬가지. 심지어 절에서 술, 고기, 양념을 판매하여 수익창출까지.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교세확장.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배경에는 권문세족의 비호. 결국 권문세족과 불교계는 공생관계. 이러한 관계 때문에 국가재정이 파탄나자 유생을 양성하는 성균관에까지 악영향. 관리들의 녹봉 지급도 곤란. 신진사대부들이 피해를 입게 됨.
이성계 일파인 정도전이 권력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반발과 해결책으로 불교계 정리 - 결과적으로 새로 세워진 조선은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이데올로기의 교체가 이루어짐.